[법과 시장]용산기록과 국가의 처신

정기동 변호사 2009.11.16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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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시장]용산기록과 국가의 처신


개인이 법을 지키지 않으면 제재가 따른다. 징역을 살기도 하고 면허가 취소되기도 한다. 제재가 법의 준수를 강제한다. 그런데 국민에게 제재를 강제하는 국가의 경우는 어떠할까. 국가는 법을 어길 수 있을까.

개인이 건물을 지으려면 허가를 받아야 하지만 국가기관은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다. 건축법은 허가권자와 협의만 하면 허가를 받은 것으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10층 이하의 건물만 허용되는 지역에서 예컨대 경찰청이 구청장이 반대하는데도 협의를 거쳤다는 이유로 20층 신청사를 지으면 어떻게 될까.



협의를 거쳤으니 적법한가, 10층이 넘었으니 위법한가. 흥미진진한 가정이지만 건축법에는 이에 대비한 규정이 없다. 우리 법은 국가기관이 당연히 허가권자의 의견을 따를 것임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정소송법은 법원이 행정처분을 취소하면 그 판결은 처분을 한 해당 관청을 비롯한 모든 행정관청에 효력이 미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처분권자가 판결에 어긋나는 처분을 다시 할 경우에는 어떻게 되나.



그 처분은 다시 행정소송의 대상이 되어 또 취소될 것이 분명하지만, 그래서야 처분과 취소판결이 되풀이될 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처분권자가 법률의 규정대로 판결에 따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 법은 국가 스스로를 준법행정의 구현자로 상정하고 있다. 최근 피고인 전원에 대하여 중형이 선고된 용산사건의 1심 재판과정에서 크게 논란이 된 검찰의 수사기록공개 문제를 이와 관련하여 생각해보자.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검사가 사건 관련 서류의 공개를 거부할 경우 피고인이 법원에 이를 허용할 것을 신청할 수 있다. 용산사건의 변호인은 이 규정에 따라 법원에 수사기록의 등사허용신청을 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였지만 검찰은 여전히 공개를 거부했다.


법원의 결정에 따르지 않는 검찰을 제재하거나 법원이 공개를 강제하는 규정은 없다. 다만 검사가 '법원의 결정을 지체 없이 이행하지 않을 때에는 해당 증인과 서류를 증거로 신청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을 뿐이다.

검찰은 문제의 기록이 공소사실과 관련 없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불이익을 감수할 경우 법원의 결정을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입장인 듯하다. 증거법상으로는 틀리지 않는다. 검찰은 그 기록의 증거제출을 포기하고 비공개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수사기록의 공개를 명한 법원의 결정은 과연 검찰이 따를 수도 있고 따르지 않을 수도 있는 증거법상 선택의 문제에 그치는 것인가. 법원 결정의 이행은 소송당사자의 문제일 뿐이고 법의 구현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인가.

형사소송법이 단순히 '이행하지 않은 때'라고 하지 않고 '지체 없이 이행하지 않은 때'라고 한 것은 제때 이행하지 않으면 아예 이행하지 않은 것과 같이 취급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검사가 뒤늦게 이행하는 경우는 있어도 법원의 결정을 거슬러 아예 이행하지 않는 사태는 차마 예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그렇게 보는 것이 건물건축의 협의규정과 취소판결의 효력규정을 관통하고 있는 준법행정의 구현자로서의 국가의 모습에 더욱 부합하는 것은 아닐까. 게다가 피고인들이 재판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제쳐두더라도, 검사는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도 제출할 의무가 있는 공익의 대변자가 아닌가.



검찰의 이번 결정은 협의를 마쳤다는 이유로 20층 건물을 짓고 취소판결의 취지에 어긋나는 처분을 다시 하는 경우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한때 국가가 앞장서 법을 어기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는 지금 많은 비용을 치르면서 그 잘못을 바로잡고 있는 중이다. 이제 와서 다시 그 전철을 밟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늦지도 않았고 방법이 없지도 않다. 뒤늦게라도 기록을 공개하면 된다. 그것이 우리 법이 예정하고 있는 국가의 처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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