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기운' 세운상가 40년의 영욕

머니위크 지영호 기자 2009.11.18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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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위크 커버]대한민국 시장1번지 '청계천 재테크'

세운상가, 욕망의 이름으로 나를 찍어낸 곳
내 세포들의 상점을 가득 채운 건 트레이시와 치치올리나,
제니시스, 허슬러, 그리고 각종 일제 전자 제품들,
세운상가는 복제된 수만의 나를 먹어치웠고
내 욕망의 허기가 세운상가를 번창시켰다

시인이자 영화감독인 유하의 연작시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의 일부다. 최근 조인성 주연의 <쌍화점>의 감독이기도 한 유하는 세운상가를 욕망의 이름으로 자신을 찍어낸 곳이라고 풀이했다.



플레이보이와 같은 성인 잡지나 성인 비디오테이프의 추억을 떠올릴 때면 으레 등장하는 곳이 이곳 세운상가다. 친구들과 삼삼오오 무리지어 답사를 갔다가 "끝내주는 게 들어왔다"는 한 호객꾼의 말에 현혹돼 구입한 비디오테이프에 강의 한번으로 국어과목을 ‘끝내 주는’ 서한샘 선생님이 등장하더라는 눈물겨운 에피소드도 세운상가에서 떠올릴 법한 추억이다.

을씨년스런 11월의 어느 날 찾은 세운상가의 모습은 한때 인공위성도 만든다는 전설을 찾기 힘들었다. 호객꾼과 손님으로 북적이던 골목은 노래방기기 판매점에서 튼 음악만 시끄러울 뿐 오고가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회로를 판매하는 몇몇 점포가 공대 학생들의 졸업 작품을 제작한다는 내용으로 호객행위를 대신하고 있었다.



1990년대 초반까지 호황을 누렸던 성인비디오 판매점은 사라졌지만 색다른 물품이 과거 성지(性地)의 명맥을 잇고 있다. 바로 사생활 및 보안 관련 물품이다. 몰래카메라를 비롯해 도청장치, 위치추적기, 도박장비 등 형사나 사설탐정들이 사용할 법한 물건들이 성인비디오를 대신해 자리 잡았다.

이들 장비를 찾아내는 탐지기도 판매한다. 영화 <연애술사>에서 연정훈과 박진희가 자신들의 정사장면이 찍힌 모텔을 찾기 위해 사용했던 몰카탐지기나 도청탐지기도 이곳에서 구입할 수 있다. 창도 판매하고 방패도 판매하는 곳이 이곳 세운상가다.

성과 관련된 제품은 비단 전자제품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무허가 비아그라나 흥분제, 최음제도 이곳에서 구입할 수 있는 물품이다.


1966년 계획된 세운상가는 주로 가전제품과 전자부품이 주를 이뤘다. 1980년대 학생들의 필수품이었던 ‘마이마이’나 ‘아하’ 같은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사기위해 전국에서 모여드는 곳이기도 했다.

한때 영화를 누렸던 세운상가의 전자제품은 인근의 대형 백화점이나 용산 전자상가가 생기면서 힘을 잃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 성인용 비디오물이었다. 이들 역시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온라인에 밀려 자취를 감췄다. 지금은 전자제품이나 가전제품, 조명부품, 보안제품으로 명맥을 잇고 있지만 세운상가 하면 떠오르는 물품군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 것은 시대의 흐름 탓이다.
'세상의 기운' 세운상가 40년의 영욕


◆녹색개발 흐름에 직면한 세운상가



시대의 흐름이 녹색으로 바뀌면서 이 지역에도 메스가 가해졌다. 서울시 도심 한가운데에 거대한 공원을 조성해 시민들의 쉼터를 제공하자는 것인데 그 부지가 세운상가 자리다.

서울시는 도심재창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세운상가를 비롯, 대림상가-삼풍상가-진양상가에 공원을 조성해 종묘에서 남산을 잇는 도심 녹색띠를 만들겠다며 지난해 세운 초록띠 공원 조성사업계획을 발표했다.

도심재창조 프로젝트는 남북을 4개축으로 나눠 역사와 문화, 관광과 녹지를 테마로하는 사업으로 세운 초록띠 공원사업은 3번째 축에 해당된다.



도심 한가운데 자리 잡은 노후 건축물을 철거하고 폭 90m, 길이 1km의 대규모 녹지대를 건설해, 물을 주제로 한 청계천 축과 녹지를 주제로 한 세운 녹지축을 교차시키고 세계문화유산인 종묘를 연결하는 문화관광 벨트를 만들자는 것이다.

사업추진계획은 세단계다. 첫번째 단계가 종로 청계구간으로 3만3262㎡의 면적에 길이 90m의 공원과 36층 건물 8동을 조성하는 사업이다. 2단계 구간은 세운상가 가동을 포함해 청계상가, 대림상가 일대 구간(폭 90m, 길이 290m)으로 2012까지 완공 예정이고, 3단계는 풍전상가, 진양상가 일대 구간(폭 90m, 길이 500m)으로 2015년 완공 예정이다.

1단계 구간의 사업시행자는 서울시 산하 SH공사다. 사업진행이 관리처분인가방식이다 보니 시행사와 주민대표가 서로 조율해 보상을 결정한다. 시는 당초 이 구간을 2008년 말까지 끝낸다는 계획이었으나 문화재 인근 지역이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사업이 지연되고 있다. 사업시행인가는 종로구 관할로 현재 문화재청과 협의 후 결정될 예정이다.



◆세입자는 난색, 제2 용산참사 우려도

시는 지난 5월 초록띠 공원 조성사업의 첫걸음으로 종로세운상가를 헌 자리에 도시농장을 조성했다. 초등학생에게는 도심 내 농촌 체험의 장을, 시민들에게는 고향에 대한 향수를 제공한다는 취지다.

‘시티 팜’이라는 이름의 이 농장은 계절에 따라 벼, 보리, 수수, 해바라기 등 계절별 경관변화를 체험할 수 있는 작물을 재배하고 시민들이 직접 수확하는 시민행사까지 준비했다.



하지만 주변 상인들의 반응은 대부분 냉소적이다. 종로세운상가 자리 바로 옆에 위치한 상점 주인은 “그게 시티 팜인줄 처음 들었다. 뭐 심는 것 같긴 하던데 내 눈에는 헛짓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비싼 돈 들여 상인들을 몰아내고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현재 상인들은 이전에 대해 철저히 반대의견을 내놓고 있다. 3개월치 영업보상금과 사업규모에 따라 이사비를 지급하고 있지만 턱없이 부족하다는 주장이다. 서울시가 세입자를 위해 웅진그룹 사옥을 리모델링해 지은 세운스퀘어나 동남권 유통단지로 이전을 유도하고 있으나 높은 가격과 상권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전을 미루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전불가를 외치는 이유는 권리금이다. 수억원의 권리금을 들여 들어왔는데 이를 법적으로 전혀 보상받을 길이 없는 것이 이들이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이유다. 반면 서울시는 공익사업법에 의거 처리한다는 방침이어서 제2의 용산참사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세운상가 입구에 시장협의회 명의로 걸린 “오세훈 시장은 세운상가를 정치야욕의 희생물로 삼지마라”는 펼침막이 녹색띠 사업의 순탄치 않은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

  세운상가, 어떻게 만들어졌나

세운상가는 청계천변 북쪽에 위치한 세운전자상가를 지칭하는 말이지만 조금 더 큰 의미로 보자면 지금은 녹지화 된 종로세운상가를 통칭해 부르는 말이다. 많은 사람이 세운상가로 인식하고 있는 종로세운상가의 본래 이름은 현대상가다. 더 큰 의미에서 세운상가는 종로4가에서 청계천-을지로-퇴계로로 이어지는 1km 구간을 말한다.



세운이라는 이름은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얻고 발탁된 불도저 김현옥 서울시장의 작품이다. 세운상가 프로젝트의 첫 사업인 아세아번영회 기공식에서 ‘세상의 기운이 다 이곳으로 모이라’는 김 시장의 휘호에서 세운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지금은 철거된 청계고가와 남산 1ㆍ2호 터널, 마포대교 등도 모두 김 시장의 임기에 벌어진 일이다. 김 시장은 1970년 11명의 희생자를 낸 와우아파트 붕괴사고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기 까지 만 4년간 개발논리를 밀어붙였다.

세운상가 프로젝트의 구상 역시 경제개발이 모든 논리를 지배하던 1960년대 시작됐다. 종묘에서 필동까지 이어지는 무허가촌이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판단 하에 김 시장이 1966년 첨단 건축물로 이곳을 대체하겠다는 발표를 하면서 표면화 됐다.



여기에 건축의 거장 김수근 선생이 보행자를 위한 하이테크 도심건축물이라는 설계안을 내놓으며 힘이 실렸다. 지상층에는 도로를 내고 건물 위로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공중보행테크와 공중정원을 만든다는 것이 설계의 핵심이었다.

설계내용은 지금의 타워팰리스와 견주어도 될 법한 초현대식 건물로 1층에서 5층까지는 상가로 그 이상은 아파트로 짓는 최초의 주상복합이었다. 당시 외신들이 세기의 역작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을 정도로 주목받던 프로젝트였다.

지금의 녹지축의 개념을 살리면서 공간활용과 도심 빈민촌을 정리하는 일거삼득의 계획은 서울시의 민자개발추진에 따라 의미가 반감됐다. 서울시의 민자사업 방침에 따라 8개의 사업자로 분리돼 조화 없는 건축물로 탄생했기 때문이다. 사업자들은 사업 수익을 위해 각자의 길을 가게 됐고, 결국 공중보행자도로가 끊기는 등 아픔을 겪으면서 도심 슬럼화를 유발시켰다.



이제 세운상가는 ‘녹색’이라는 또 다른 개발논리에 휩싸였다. 여러 개의 사업자가 각자 진행하는 민자개발사업으로 진행하는 부분 역시 당시와 비슷하다. 서울시의 녹지축 개발이 제2의 슬럼화를 가속화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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