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만원이면 나도 '작가'…자비출판 느는 속사정

머니투데이 신희은 기자 2009.10.23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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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만원이면 나도 '작가'…자비출판 느는 속사정


"주제, 내용 상관없습니다. 300만 원이면 누구나 책 낼 수 있어요."

#1. 서울 모 대학 문예창작과 대학원생 김윤미(가명·28)씨는 한 출판사 상담원의 말에 안도했다. 김 씨는 신춘문예나 문학상을 통해 소설가로 데뷔하는 게 꿈이다. 그러나 번번이 수상에 실패해 자비를 들여 소설을 출간하기로 했다.

#2. 서울에 사는 주부 박나영(가명·54)씨는 에세이집을 낼 참이다. 등산과 여행을 다니며 써 둔 글이 꽤 모였기 때문. 책이 나오면 대기업 임원인 남편의 직장 동료와 등산모임 회원, 아들 부부, 친인척에게 자랑스레 보여 줄 작정이다.



받아주지 않는 원고를 들고 콧대 높은 출판사를 찾아다니던 시대는 갔다. 책은 더 이상 유명작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누구나 자기 이름을 단 책을 손에 쥘 수 있다.

책 제목부터 주제, 디자인, 표지와 종이재질까지 자유자재로 선택할 수 있는 '자비출판'이 인기다. 아예 자비출판을 전문으로 하는 출판사만 16곳에 달한다.



책나무출판사 관계자는 "최근 기획과 자비출판 비율이 4대 6 정도로 일반인들이 책을 많이 내는 편"이라며 "원고만 준비돼 있다면 언제든지 상담을 거쳐 한 달 안에 자신의 책이 국내 대형서점 15~20곳에 배포되도록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책은 원고 상담을 거쳐 편집에 1~2주, 디자인·인쇄 작업에 1~2주가 소요된다. 비용은 200~300 페이지 분량의 책 300부 가량을 제작하는 데 300만 원 내외. 시, 에세이, 소설, 수필, 전문서적 등 장르와 분량, 디자인, 작업하는 에디터 수 등에 따라 1000만 원까지 드는 경우도 있다.

만약 300부를 첫 출간한다면 이에 대한 수익은 대부분 출판사 몫이다. 저자가 인세를 받으려면 적어도 2000~3000부 이상은 팔려야 한다. 150부 이상 판매되면 승산이 있다고 보고 2판을 찍기도 한다.


한 자비출판 전문 출판사 관계자는 "일반인이 책을 내 베스트셀러가 되거나 판매 20~30위권에 오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저자가 스스로 경력을 만들거나 자기만족을 위해 책을 낸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자비출판의 최대 장점은 '주제가 진부하다거나 글을 못 썼다'는 이유로 책 출간을 거절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지 확인결과 유명작가의 서적만을 다루는 소수 대형출판사가 아닌 다음에야 원고를 보여주지 않아도 흔쾌히 의뢰를 받아들이는 곳이 대부분이다.

더북앤피플 출판사 관계자는 "일본·미국 등지에서는 기획보다 자비출판으로 나온 책들이 훨씬 많다"며 "책의 주제, 내용을 자유롭게 택할 수 있고 글을 잘 못 써도 누구나 저자가 될 수 있다는 '열린 시스템'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자비출판'이 느는 속사정은 따로 있다. 출판시장이 어려워 유명저자와 손잡고 책을 낸다 해도 시장조사, 계약금, 인세 등 제반비용을 상쇄할 만큼의 높은 수익을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출판사 존립을 위해서는 자비출판 비율을 늘리지 않고는 어렵다는 게 전문가의 지적이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은 "올 하반기 도서 물류량이 작년 대비 40%나 급감해 출판사가 허덕이고 있어 저자에 모든 비용을 부담케 하는 '자비출판' 비율이 늘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 소장은 "학생들에 책 읽을 시간을 주지 않는 문제풀이 위주의 입시교육도 원인이지만 올 초 경기침체를 극복한다며 정부가 도서관 책 구입 예산을 상반기에 모두 집행해버린 탓도 크다"고 분석했다.

한 출판사 편집자도 "자비출판 의뢰로 들어온 원고를 작업하다 보면 문장 수준, 내용 면에서 완성도가 떨어지는 책이 너무 많다"며 "과도한 자비출판이 책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려 출판시장과 출판사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까 걱정된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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