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코에 당한 중소기업, 환율하락에 또 운다

더벨 이승우 기자 2009.09.24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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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크레딧라인 끊겨 환헤지 못해

이 기사는 09월21일(17:33) 머니투데이가 만든 프로페셔널 정보 서비스 'thebell'에 출고된 기사입니다.


지방의 중소 조선업체인 A사는 몇 달전 750만 달러 규모의 선박 수주에 성공했다. 중소 조선사로는 적지 않은 규모인데다 대형 조선사마저 지난해 금융위기 이후 극심한 수주 가뭄에 허덕이고 있는 점을 생각하면 경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일 뿐 최근 이 회사는 불안에 떨고 있다고 한다. 기다렸다는 듯이 환율은 빠르게 하락해 이제는 1100원대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어 앉아서 손해를 보게 생겼기 때문이다.

금융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국내 조선사들은 수주를 하는 즉시 은행과 선물환 거래를 체결해 환율 변동위험을 피했다. 은행에게 조선사는 귀한 고객이었다. 그러나 이젠 옛날 이야기다. 은행의 한 외환딜러는 "대형 조선업체의 경우에도 라인(거래한도)을 줄인 경우가 허다하다. 중소형사는 대부분 라인 자체가 끊겨 은행과 환헤지(hedge) 거래를 하기가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금융위기 이후 은행이 거래 기피

A사 역시 은행과의 외화 거래 라인이 현재 없다. 때문에 조선업체들의 전통적인 환헤지 수단인 선물환을 통해 달러를 미리 팔지 못하고 있다. 선수금 20% 정도를 제외하고 나머지 달러 대부분은 향후 2~3년에 걸쳐 들어오는데 미리 환헤지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환율이 더 떨어지면 손실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은행이 기업과 외환 거래에 극도로 신중해진 것은 금융위기 이후 새로 생긴 풍속도다. 정부가 수출입은행을 통해 무역금융 용도로 달러자금을 지원했지만 유산스와 무역금융 등 3개월 혹은 6개월 정도의 짧은 만기 용도로만 기업들에게 제공되고 있다. 보통 1∼3년 이상으로 만기가 상대적으로 긴 선물환 거래는 뚫기가 이만 저만 어려운 게 아니다.


이미 선물환을 팔아 놨던 기업들의 경우 올들어 환율이 하락하며 선물환매도평가손실이 줄어 다행이지만 그만큼 은행과 거래한도가 줄었다. 환헤지를 할 수 있는 여지가 계속 줄어들고 있는 셈이다. 은행 대고객 담당자(세일즈 파트)들은 A 조선업체와 같은 상황에 처한 중소기업들이 수두룩하다고 전하고 있다.

키코(KIKO)로 홍역을 치른 중소기업들은 은행과의 거래가 더욱 제한적이다. 키코 등 통화옵션 계약은 유효한 상태로 지속되고 있지만 선물환 신규 거래는 아예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은행 한 관계자는 "지난해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윗선에서부터 외화 관리 강화를 주문하고 있다"며 "좋아진 시장 여건에도 불구하고 외화 크레딧 라인 신설은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키코 등으로 은행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곳은 원화와 외화 통틀어 거래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고 덧붙였다.

중소기업 환헤지 수단의 보루인 수출보험공사 보증 제도를 이용하지 못하는 중소기업들도 많다. 지난해 환율 급등으로 환변동보험 환수금을 제때 내지 못한 기업들이 많기 때문이다. 분할 상환금의 30% 이상을 내지 못한 기업들은 추가 거래가 어렵고 30%이상을 상환 완료한 경우에도 정상기업의 이용 가능한도 50%이내(수출실적 등의 30%범위 내)로 신규 거래가 제한돼 있다.

외화 라인과 상관없이 은행과 통화옵션(풋옵션 매수) 거래가 가능하지만 프리미엄이 너무 비싸 현실적으론 불가능하다. 만기가 1년 이상만 돼도 거래금액의 10%의 비용을 프리미엄으로 지불해야 한다.



오를 때 터지고 내릴 땐 한숨만..현실적 대안은

결국 환율이 오를 때는 키코 등 파생상품으로 터지고 이제 조금 이익을 볼 만한가 싶어 헤지를 하자고 하니 수단이 없어진 셈이다.

중소기업 한 관계자는 "환율이 급등할 때 키코로 큰 손실을 보고 난 이후 올해 환율 하락의 기쁨을 누리려고 하지만 마땅한 환헤지 수단이 없다"며 "오를 때는 터지고 내릴 때는 쳐다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환율이 더 내릴 것으로 보여 향후 예상 매출에 대한 환헤지를 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고 덧붙였다.



프리미엄이 바로 비용 처리되는 통화옵션과 달리 선물환 거래에 대한 담보금 지급이 현실적인 수단으로 제기되고 있다. 만기가 6개월 정도면 거래금액의 5~10%, 1년 이상이면 10~15% 정도의 담보금을 지급하고 은행과의 라인을 신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어느 정도의 유동성이 있는 기업이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또 다른 대안은 통화선물이다. 거래금액의 4.5%에 해당하는 증거금을 납부하고 달러/원 선물 매도를 3개월 단위로 롤오버(만기연장)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달러 선물은 손익이 매일 정산돼 투기의 유혹에 빠져들 가능성이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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