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새고, 녹물 마시는 '10억 아파트'

머니위크 지영호 기자 2009.09.23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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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위크 커버]희망고문/ 은마아파트

비새고, 녹물 마시는 '10억 아파트'


“올 여름 내린 비를 지금도 퍼내고 있다니까요. 길이가 자그마치 125m나 되는 동이 수두룩하니 연 인원으로 따지면 족히 200명은 동원됐을 겁니다.”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를 찾은 지난 9월14일, 아파트 관리직원은 노후화가 심각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관리사무소 관리인력 수십명이 28개나 되는 동 지하에 고인 물을 매일같이 교대로 퍼내고 있다.



아무리 올 여름 게릴라성 폭우가 빈번했다고는 하지만 벌써 넉달째다. 이유는 간단하다. 낡아서다. 배수시설이 불량하고 곳곳에 누수가 많은 것이 아파트 지하실을 늪지대로 만들었다.

관리인들이 물을 퍼내는 도구는 쓰레받기다. 집수정 설계가 잘못돼 물이 한 곳에 고이지 않고 곳곳에 퍼지는 탓이다. 깔때기처럼 배수구 중심부로 물이 고이도록 설계해야 하는데 이곳 지하실은 평평하다. 해마다 큰 비만 오면 지하에 물이 고이면서 곰팡내와 악취가 진동하는 일이 다반사가 됐다.



여러 현장을 경험한 관리직원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이 아파트 김재회 관리과장은 “밀집형 주거단지가 많기로 소문난 상계동 아파트 관리사무소 등 여러 곳의 아파트 관리를 경험했지만 이곳처럼 거주환경이 나쁜 아파트는 처음 본다”고 말했다.

이 아파트 단지 주민들은 수압이 약한 탓에 집집마다 양동이에 물을 받아놓는다. 휴가라도 다녀오느라 수도를 며칠 사용안하면 녹물도 나온다. 수돗물로 라면을 끓이는 것이 무섭다는 주민도 있다. 노후한 배관으로 물이 새는 곳도 부지기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는 먼 나라 이야기다. 보통 아파트 배관 조절 장치들은 옥상에 있어 보수공사가 수월하지만 이곳은 각 집안 천정에 있다. 낮 시간에 사람이 없기 때문에 보수는 꿈도 못꾼다.


공사 규모도 간단치 않다. 오래된 아파트다보니 벽이고 천정이고 죄다 뜯어내야 한다. 한두집도 아니고 수천세대의 집을 공사하자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만약 보수공사를 하려면 리모델링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이 김 과장의 이야기다.

◆주차, 전쟁 넘어 지옥



올해로 31살인 은마아파트에는 모두 4424가구가 산다. 방 3개 화장실 1개짜리 31평(102㎡)과 방 4개 화장실 2개짜리 34평(112㎡) 두종류만 있는 복도식 아파트다. 1979년에 입주를 시작했으니 지금처럼 지하주차장이 있을 리 만무하다.

평일 오후임에도 2중 주차는 기본, 종종 3중 주차된 차량도 보인다. 이 시간은 대부분 여성운전자지만 한눈에 봐도 운전 실력이 대단하다. 통과하기 어려워 보이는 차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간다.

관리인의 말에 따르면 은마아파트 주부들은 다른 아파트의 남자 못지않다. 조금이라도 공간이 생기면 비집고 들어오는 주차실력을 기본이고 혼자서도 SUV 같은 차량을 밀고 차를 빼낼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고는 숱하게 발생한다. 김 과장은 “은마아파트 차량 가운데 흠집 없는 차는 한대도 없다”고 잘라 말한다. 이제는 범퍼가 찌그러지는 정도는 서로 웃으면서 용인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주말이면 은마아파트의 주차난은 전쟁 수준까지 치닫게 된다. 대부분의 차량이 빠지지 않다보니 엄청난 혼란이 발생한다. 한 주민은 “주차전쟁으로 부족하다. 지옥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고 성토한다. 주차문제로 시비가 붙거나 싸우는 일이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은마아파트는 집안뿐 아니라 마당(?)도 불편한 곳이라는 결론이다.

◆세입자의 희망은 자녀의 성공



노후화된 시설과 각종 주차난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왜 이곳을 벗어나지 않을까? 이유는 세입자와 소유자에 따라 다르다.

세입자를 붙잡는 것은 교육환경 때문이다. 은마아파트가 있는 대치동은 국내 최고의 학원 밀집지역이자 최고 학군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인근에 숙명여중고, 진선여중고, 휘문중고교, 경기여고, 단대부고 등 명문 학교들이 즐비하고, 1000여개에 이르는 학원들이 성업 중이다. 방학기간에는 여름특강을 듣고자 원정 수강도 이뤄지는 교육의 메카다.

인근 중개업소 관계자에 따르면 “새 학년을 앞둔 2월경에 세입자들이 몰리고 학년이 끝나는 12월에 세입자가 나가는 것이 은마아파트의 거래 패턴”이라면서 “세입자의 90% 가량이 교육 때문에 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곳 세입자는 대부분 교육열에 불타는 학부모라는 이야기다. 노후하고 불편한 주거환경에도 2억5000만원가량의 거액을 전세금으로 기꺼이 지불한다. 자녀가 사회에서 성공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희망은 현실의 고통을 감내하게 만든 셈이다. 이른바 '행복고문'이다.

◆재건축, 꿈에 그치나

소유자의 희망은 잘 알려지다시피 ‘재건축’에 걸려있다. 될 듯 말 듯한 재건축 허가가 자꾸 희망을 심어준다. 지난 17대 대선에서 재건축 규제 완화 등을 내세운 이명박 후보에 대한 압도적인 지지 역시 이 지역 주민들의 재건축에 대한 열망이다.



최근 은마아파트 재건축 추진위원회는 안전진단을 준비하고 있다. 벌써 네번째다.

이전까지 이곳 주민들은 재건축의 첫단추인 안전진단 통과를 갈망해왔다. ‘이번에는 되겠지’라고 생각하다가도 번번이 쓴잔을 마셨던 대다수의 아파트 소유자들은 재건축을 ‘희망고문’이라고 말한다.

현재 은마아파트의 재건축 추진에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소형평형 의무비율이다. 은마아파트처럼 중대형 면적의 아파트를 재건축하려면 전체 공급물량의 20%를 60㎡ 이하의 소형면적으로 지어야 한다.



완화될 듯 했던 의무비율이 서울시의 의지대로 ‘현행 유지’로 결정되면서 다시 한번 재건축의 희망을 기대했던 아파트 소유자에게 좌절감을 안겼다. 이대로 재건축을 하면 주택 면적이 좁아질 수 있어 재건축 사업 추진이 쉽지 않다.

물론 의무비율을 줄여 재건축되면 상황은 역전된다. 박상언 유앤알컨설팅 대표는 "은마의 재건축이 이뤄질 경우 잠실 등 강남권 중형아파트의 평당 시세인 5000만원을 따라가지 않겠느냐"며 "현재 3종 일반주거지역인 은마타운이 상업지역으로 종 변경되면 소위 대박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다른 지역과의 형평성 때문에 가능성은 크지 않다. 투기수요가 상당히 몰려있고 시세가 충분히 반영된 만큼 은마 대박은 '꿈'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다.



박원갑 부동산일번지 대표는 "은마는 투기세력이 점령한 곳으로 이미 재개발에 대한 기대 시세가 충분히 이뤄졌다"면서 "용적률이 오르지 않은 한 재건축의 꿈은 거품에 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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