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음악가의 길을 선택했기에 그는 공사판 막노동일부터 책장사까지 닥치는 대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학습지 판촉일을 했는데, 전국 3등을 해서 포상금도 받았죠. 1985년엔 소형차 프라이드를 한 대 사서 음대준비생들 레슨을 하러 다녔어요. 그 당시 한 달에 200만 원을 벌었습니다."
강한 생활력으로 비엔나 국립오페라 극장의 합창단으로 일했던 그는 그동안 번 4만달러를 가지고 귀국했다. 하지만 10년의 긴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그를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친구들에게 사기도 당하고 실패를 하면서 5년 동안 아파트 전세를 전전긍긍했어요. 자리를 잡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녔죠."
이후 서라벌대, 서울종합예술원 교수로 임명되면서 그는 점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는 한 신사복 모델을 했는데, 제가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게 정말 감사하더군요. 이런 활동을 통해서 대중들에게 친근하게 클래식을 알릴 수 있다면 아무리 바빠도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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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도 했지만 음악을 한 것을 후회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는 그는 매년 '소아암 환자 새생명 돕기' 자선 음악회를 통해 음악에 대한 열정을 전하고 있다. "소아암 어린이 150명을 초대하면 가족들까지 700명 정도가 꽉 찹니다. 성악가인 아내와 무료로 출연해 주시는 음악가들이 익숙한 가요나 드라마OST곡을 부르죠. 수익금은 공연비용 제외하고 희귀질환 연합회에 드리는데, 아직 적자라서 저희 힘으로는 힘들어요. 도움의 손길을 모으려면 제가 더 유명해져야죠.(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