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亞, 환란 후 달러집착이 인플레 키워"

머니투데이 엄성원 기자 2008.06.19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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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T 지적… "성장·물가안정 동시에 노려 진퇴양난에 빠져"

- 성장, 물가 사이서 고민..시기 놓쳐
- 환율 유지 위해 통화정책 포기는 실수
- 실질금리, 환란때 이하로 추락

불과 반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이 물가 통제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당시 아시아국 정부들의 신경은 온통 미국과 유럽의 경기 둔화에 쏠려 있었다. 경기 둔화로 주요 수출처인 미국과 유럽의 소비가 위축될 경우, 지난 10년간 지속된 성장세가 중단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은 금리 인하를 단행하며 정부의 물가 통제 움직임에 대한 걱정은 붙들어매라며 물가 관리를 호언장담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6개월 남짓 지난 지금, 상황은 급변했다. 현재 아시아 경제의 숨통을 틀어쥐고 있는 것은 미국의 소비 위축이 아니다. 이미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달아나버린 물가가 현 위기의 주범이다. 이에 아시아 국가들이 경기 대신 물가를 외치며 앞다퉈 금리 인상 카드를 꺼내들고 있지만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아시아 각국의 인플레이션 심화에 대해 정부의 능력과 의지 부족을 질책했다. FT는 내수 물가와 수입 물가가 동시에 오르는 압박 속에서 경제가 고사 위기에 처했지만 정부는 이를 통제할 만한 힘도, 인플레 난국을 근본적 차원에서 돌파해나갈 의지도 갖추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아시아 딜레마=자기모순

FT는 아시아국가들의 딜레마의 본질은 근본적 자기모순에 있다고 평가했다.

이코노미스트들과 서구 경제정책결정자들은 경기 진정을 인플레 대응의 최우선 방책으로 삼고 있다. 낮은 성장세를 통해 경기 불안을 조장함으로써 기업가와 노동자 모두가 가격과 임금 상승을 돌아볼 수 있게끔 하는 식이다. 빠른 성장 뒤 사회 전체가 잠깐 숨 돌릴 틈을 갖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사고방식이 배어나오는 부분이다.


반면 지금의 아시아는 성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 수년간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온 아시아국가에는 현재 '성장 아니면 추락'이라는 명제가 존재한다. 이런 분위기는 경제는 물론 사회, 정치적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4월 중국의 소비자물가는 전년 대비 7.5% 상승했다. 9년반래 최고 수준이자 1년 전 3.6%에 비해 두배 이상 상승 속도가 빨라졌다. 4~5월 파키스탄의 물가 상승률(연률)은 17.2~19.3%를 기록했다. 컨설팅업체 메르서는 2011년까지 인도의 임금 수준이 연 평균 15%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상황이 이렇지만 아시아국들은 선뜻 금리 인상이나 유가 보조금 축소 또는 철폐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일례로 중국의 경우, 정부의 내수 연료유 가격 제한 탓으로 내수 유가와 국제 유가 사이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

성장과 물가 안정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아야 한다는 정부의 강박관념이 스스로를 진퇴양난의 굴레에 옭아매고 있다.

◇ 亞 인플레 피해, 더 심각



최근의 인플레 추세는 비단 아시아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북미와 유럽 선진시장은 물론 남미 이머징마켓도 유가, 식품가 상승으로 인한 인플레 위협을 겪고 있다. 인플레 탓에 브라질 중앙은행은 지난 4월 이후 금리를 거듭 인상했으며 터키 중앙은행은 내년 인플레율 통제 목표를 두배 가까이 상향 조정했다.

전세계가 같은 상황에 처해 있지만 아시아가 느끼는 위기감은 남다르다. 최근 인플레의 주요 요인으로는 유가와 식료품 상승을 들 수 있다. 아시아는 이 같은 실체를 가진 인플레 요인에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우선 아시아국가는 전체 가계 지출에서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한국인의 식료품비 비중은 14%선이지만 중국과 인도의 경우, 식료품비 비중이 각각 33%, 57%에 달한다.



◇ 환란 후 달러 집착이 위기 불러

FT는 또 아시아국 정부들의 자유로운 자본흐름(free flow)과 환율정책, 통화정책의 비현실성도 인플레 심화 요인으로 지적했다. FT는 아시아국들이 그간의 단편적 정책 결정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평가했다.

FT는 노벨상 수상 경제학자 로버트 먼델 교수의 '3원체제 불가능성'(impossible trinity)을 통해 아시아국 정부의 선택의 잘못을 지적했다.



먼델 교수는 자유로운 자본흐름과 환율정책, 통화정책을 동시에 추진할 수는 없다고 단정하고 있다. 최소한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먼델 교수는 이에 정부는 선택의 입장에 처하게 되며 결국 정부의 선택에 따라 세 정책 중 적어도 하나는 버려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FT에 따르면 아시아국들은 1997~1998년 환란 이후 해외 투자 유치를 위해 자유로운 자본흐름을 우선시했다. 이에 통화정책은 자연스레 후순위로 밀려났다.

정부의 일순위 간택 대상은 자유로운 자본흐름이었다. 해외 투자 유치라는 절대 명제 하에서는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정부는 이후 나머지 환율과 통화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그리 크지 않았다. 무역흑자 극대화도 달러 사랑의 한 방편이다. 결국 고환율을 택했고 통화정책은 버려졌다.

결국 정부의 의도대로 외화는 흘러들어왔고 무역흑자도 확대됐다. 그러나 동시에 물가도 뛰었다. 통화정책을 포기한 댓가이다.

중국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페그제와 이후 정부의 환율 고시를 통해 위안화 가치를 꽁꽁 묶어놓은 덕에 해외 투자와 무역흑자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불어났다. 미국과 유럽이 신용위기의 안개 속을 걷기 시작한 이후 달러 유입은 한층 강화됐다.



하지만 달러는 복덩이에서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급격히 늘어난 유동성은 걷잡을 수 없이 물가를 밀어올리고 있다. 국채를 발행하고, 지급준비율을 인상하고,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봐도 상황은 불변이다. 그렇다고 정책 기조를 대폭 변경할 수도 없다. 최소한 8월 베이징올림픽까진 이전 정책을 고수할 수밖에 없다.

◇ 실질금리, 환란 때 이하

지난해 에르브 하노운 국제결제은행(BIS) 부행장은 아시아국 대부분의 금리가 향후 10~15년 저평가 상태에 머무르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근의 환율시장 분위기로만 보자면 하노운 부행장이 10~15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던 통화 가치 제자리 찾기 기간이 크게 단축된 듯하다. 그만큼 후폭풍도 강렬하다.



물가 상승 여파로 아시아국의 실질금리는 이미 마이너스(-)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UBS에 따르면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국의 평균 실질금리는 -1.7%를 기록하고 있다. 1990년대 환란 직전이나 직후보다 못한 수준이다.

유가나 식료품가격이 추가 상승할 경우,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인플레 국면이 단기 차원을 지나 장기화될 우려도 있다.

◇ 사회-정치 불안으로 확대



인플레는 이제 국가 재정을 넘어 정부 존립까지 위협하는 거대 괴물로 성장했다. 지난주 이명박 대통령은 최근의 경제상황이 1970년대 '오일쇼크'와 1997년 아시아 환란 당시를 연상시킨다고까지 말했다.

다소 정치적 과장이 더해진 듯하지만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석유 보조금을 지급하는 국가의 경우, 국가 재정 고갈 위협을 받고 있다. 하루 빨리 보조금을 축소하거나 폐지하고픈 심정이다.

국제사회도 석유 보조금으로 국내 유가가 왜곡되는 현상이 발생, 일부 아시아국에서 고유가에도 불구, 석유 소비가 줄어들지 않고 있다며 보조금 폐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서민층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이미 가격이 치솟은 상황에서 무작정 보조금을 폐지할 수도 없는 실정이다.

인플레로 인한 사회 불안도 이미 속출하고 있다. 파키스탄과 스리랑카에서는 인플레에 격분한 일부 시민들이 폭도로 변모했고, 네팔에서는 고유가에 열받은 사람들이 마오쩌동주의 정당의 연정 구성 시도를 되돌리려는 거리시위를 벌이고 있다. 인플레 국면이 심화되면서 언제 어디서든 폭발 가능한 불안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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