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혈이 낭자한 외환시장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 2008.04.30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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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위크 칼럼]

외국인 투자자 A가 1000억원을 빌린다(외국인의 거액원화 조달은 금지되어 있으나 일단 가능하다고 하자). 뭘 하나 봤더니 외환시장에서 원화를 팔고 달러를 사들인다. 환율이 1달러당 1000원이므로 그는 1000억원을 팔아서 1억달러를 살 수가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 외국 투자자가 알고 보니 큰 손이다. 바로 거대한 헤지펀드였던 것이다. 이제 소문이 퍼지고 국내투자자를 포함하여 많은 투자자가 흔들린다. 시장은 걷잡을 수 없이 움직인다. 원화투매가 일어나고 달러사재기가 시작된다.

외환시장에서 이제 환율은 달러당 1100원으로 오른다. 투매가 계속되자 최후의 주자가 나선다. 바로 한국은행이다. 원화가치방어에 있어서 최후의 보루인 한국은행이 나서서 시장에 개입하면서 달러를 팔고 원화를 사들인다. 치솟던 달러시세는 잠시 주춤한다. 강력한 상대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한치의 양보 없는 승부가 이루어지지만 문제는 외환보유고이다. 중앙은행이 달러를 팔고 원화를 사들이기 시작하면서 외환보유고는 줄어든다. 만일 공격의 강도 곧 달러매도세가 강해서 중앙은행이 밀리기 시작하고 달러보유고가 줄어들고 부족해지면 달러시세가 상승하기 시작하고 이제 상황은 끝난다. 중앙은행이 외환보유고 부족으로 손을 들기 때문이다.

이제 달러시세는 1500원으로 상승한다. 1000억원을 빌려서 1억달러를 사놓은 투자자 A는 신이 난다. 1억달러의 자산가치가 1500억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빚 1000억원을 빼면 500억원을 번 셈이다. 새로운 환율 1500원/달러를 적용해도 자그만치 3333만달러이다. 3000여만달러를 며칠사이에 번 것이다. 이것이 바로 투기적 공격(speculative attack)의 실체이다.



고평가된 통화를 빌려서 외환시장에 내다 팔면서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통화를 사들이는 이 전략은 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를 공격대상으로 삼게 되므로 성공할 경우 이윤규모가 매우 크다. 단시간에 큰 돈을 챙기게 되므로 헤지펀드들이 애용하는 전략 중 하나이다. 실제로 조지 소로스와 그가 운용하는 퀸텀펀드가 전세계에 알려진 것도 바로 이 투기적 공격을 통해서였다.

이 전략은 위의 설명에서 원화대신에 파운드화를 그리고 한국은행 대신 영란은행을 대입하면 전략의 시나리오가 똑같아진다. 소로스는 1992년 고평가된 파운드화에 대한 투기적 공격을 감행하여 성공함으로써 파운드화를 약 20% 절하시켰고 이 과정에서 약 10일간에 10억달러의 이익을 챙겼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펀드에 가입한 고객 중에는 영국황실이 있었다는 것이다. 영국중앙은행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한 자금 중에 일부가 영국황실에서 나온 셈이다. 이 사실을 흥미 있게 여긴 언론들이 늦게 이를 대서특필하기 시작하였고 조지 소로스는 일약 세계 유명인사로 떠오르는 행운을 안았다.


이 예가 보여주듯 외환시장은 유혈이 낭자한 진검승부의 시장이다. 수많은 세력들이 개입하고 투기가 난무하고 돈을 벌기도 하고 잃기도 하는 어려운 시장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충분한 유동성이 창출되면서 달러를 사거나 팔 필요가 있는 실수요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달러를 사거나 팔기에 부족함이 없어진다.

한마디로 투기적 세력에 의한 유동성 창출이 실수요자들에게 부담 없이 포지션을 취하거나 정리할 수 있도록 함으로서 궁극적으로 도움을 주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나타나는 것이다. 모든 거래를 투기가 아닌 거래와 투기거래로 구분하는 식의 이분법적 시각은 문제가 있다. 투기거래가 사라지면 유동성이 줄어들고 그 피해가 실수요자에게도 미칠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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