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지펀드 자산운용의 핵심 부상, 배경은

저메인 쎄 GAM 이사 2007.11.28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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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 심지어 뛰어난 투자자들마저도 헤지펀드가 투자 시장에 등장한 것이 최근이라고 흔히 오해를 한다. 헤지펀드가 아시아 시장에서는 1980년대에 처음 등장했지만, 세계 최초의 헤지펀드는 40년 전 미국에서 처음 설립되었다.

헤지펀드의 기본 개념은 오래 전부터 존재했지만, 그 인기가 널리 퍼지고 성장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사실 헤지펀드의 인기는 1990년대 초 이후 급격히 상승하였으며, 현재까지 그 성장세는 좀처럼 시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역사상 첫번째 헤지펀드는 1949년 호주 멜버른 태생의 하버드대 출신인 알프레드 윈슬로우 존스(Alfred Winslow Jones)에 의해 설립되었다. 존스는 포춘(Fortune)지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당시 투자관리 트렌드에 대해 조사를 실시했으며 이 조사를 통해 당시의 금융 관리 방법보다 더 뛰어난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다.

존스는 자신의 돈 4만달러를 포함한 총 10만달러를 모아 기자 활동을 하며 조사한 이론을 바탕으로 투자 파트너십을 구축했다. 투자기법은 공매도와 레버리지를 결합하는 간단한 방법을 사용했으며 마케팅 문구 역시 간단했다.



"보수적 목적 달성을 위한 투기적 투자수단"이 그것이었다. 존스 펀드의 성과는 시장의 타이밍 보다는 주식 선택에 달려있었다. "레버리지"가 이미 다른 포트폴리오에서도 사용되는 방법이긴 했지만 레버리지의 목적은 효율적인 포트폴리오 관리가 아니라 투기를 위한 차입일 뿐이었다. 이런 방법의 헤징은 포트폴리오의 시장 변동성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존스의 헤지펀드는 1966년 포춘지에 실린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존스(The Jones that nobody can keep up with)"라는 기사를 통해 대중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 기사에는 존스의 투자방법이 상세하게 실렸으며 그의 파트너십이 그 해 가장 성공적인 뮤추얼 펀드와 비교해 44% 이상 높은 성과를 냈다는 내용이 소개되었다.

또한 1949년에서 1966년 사이 순수익률을 기준으로 평가했을 때 존스의 펀드가 일반 뮤추얼펀드보다 85%나 높은 수익률을 올렸다는 내용도 소개되었다.


1968년 초 80개에 불과했던 헤지펀드 수는 그 해 말 210개로 증가했다. 1970년부터 1974년까지는 헤지펀드 매니저들의 능력을 테스트하는 실질적인 시기였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국가들이 갑작스럽게 원유 가격을 인상하면서 두 번의 대규모 금융 및 문화 쇼크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인플레이션의 가속화 등 시장이 국제 거시경제에 거칠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주가가 크게 흔들렸으며, 이후 약세장이 이어지면서 많은 헤지펀드가 사라졌다. 당시 대부분의 헤지펀드가 주식 매수/공매도(long/short)와 매수 중심형(long bias) 전략을 사용했기 때문에 많은 매니저들이 상당한 손실을 보았고, 그 결과 1970년대 중반 헤지펀드 매니저의 수는 100명 미만으로 크게 감소했다.



1970년대 말이 되자, 많은 헤지펀드가 그 근본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주식 매수/공매도 매니저들은 그렇게 제한된 공간에서 돈을 벌기란 쉽지 않다고 생각하고 세계 경제상황에 대한 분석을 주식뿐만 아니라 채권, 통화 시장에까지 적용하기 시작했다.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마이클 스타인하트(Michael Steinhardt)와 줄리안 로버트슨(Julian Robertson), 조지 소로스(George Soros)와 같은 사람들은 당시 주식 매수/공매도에서 부상하였으며 "거시적" 헤지펀드 전략을 통해 큰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펀드 매니저들이다.

1980년대 중반에는 새로운 종류의 트레이더가 등장했다. 그 동안 시카고 거래소는 수십 년 동안 훌륭한 트레이더를 배출하는 양산소의 역할을 해왔다. 이들 '상품거래자문업자(Commodity Trading Advisers)'들은 새로운 시장에 자신의 기술을 적용했고, 그 결과 폴 튜더 존스(Paul Tudor Jones), 루이스 베이컨(Louis Bacon), 브루스 코브너(Bruce Kovner)와 같은 위대한 이름이 탄생하게 되었다.



1980년대 초에 매수/공매도 매니저들이 채권 거래를 이용하여 부와 명성을 쌓았다면 1980년대 말의 새로운 매니저들은 대게 주식의 몰락을 통해 부와 명성을 쌓았다.

헤지펀드 부활의 중요한 촉매는 1986년 5월 기관투자자(Institutional Investor)라는 잡지의 커버스토리였다. 이 잡지에 따르면, 로버트슨의 타이거펀드는 첫 6년 동안 비용 및 성과보수를 제외하고 연간 43%의 높은 수익을 올렸다. 총 수익은 연간 약 50% 로, 동일 기간 동안 약 19%의 수익을 내던 S&P 500과는 큰 비교가 되었다.

로버트슨은 위험이 높은 도박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기 보다는, 존스의 오리지널 모델을 따르고 향상시키는 방법을 통해 공매도로 꾸준히 포트폴리오를 분산하였다. 헤지펀드 투자와 유니버스는 그 우수한 평판과 전문적 이미지 개선, 그리고 리스크 통제를 통해 부활하여 급속히 성장했다.



그러나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헤지펀드의 선구자였던 존스이 오히려 기반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최고 2억 달러를 기록했던 존스의 운용 펀드 자산이 3,000만 달러로 떨어져 1986년에는 결국 펀드를 폐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1990년에 헤지펀드리서치(Hedge Fund Research)는 펀드오브펀드(funds of funds)를 포함해 총 610개의 헤지펀드가 있으며, 그 중 대부분이 미국에서 운용되는 것으로 추정했다. 1

990년대에는 헤지펀드를 매매하는 매니저의 수가 연간 최고 20% 성장했으며, 운용자산규모도 수 배로 성장했다. 1992년 파운드화 평가절하와 영국의 유럽환율조절기구(Exchange Rate Mechanism) 탈퇴를 통해 소로스의 퀀텀펀드(Quantum Fund)가 20억 달러를 벌면서 헤지펀드는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게 되었다.



1990년대 주식시장이 역사상 가장 길고, 강력했던 호황기를 맞이하면서 매수/공매도 주식헤지 펀드 매니저의 수는 계속 증가했으며, 1990년대 중반에는 매수/공매도 유니버스가 유럽에서도 상당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또한 1990년대 초반부터는 유럽을 중심으로 차익거래 전략(Arbitrage Strategies)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존재하는 헤지펀드의 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헤지펀드 리서치는 2007년6월30일 기준 약 9767개에 달한 것으로 집계하고 있다. 총 수치는 보통 다중주식, 매수형 절대수익 펀드, 멀티매니저 펀드, 개별운용계좌, 독립 재량과 같은 요인으로 인해 분명치 않으며 보다 정확한 수치는 펀드를 가진 기업의 수로 약 4000~5000개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자산은 가장 큰 상위 15%의 헤지펀드에 투자된다.

2007년 유레카헤지 아시안 헤지펀드 디렉토리(Eurekahedge Asian Hedge Fund Directory)는 1150개 이상의 아시아 헤지펀드에 대한 정보를 소개했다. 유레카헤지는 2006년 말 기준으로 아시아 헤지펀드 유니버스의 총 규모가 1320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했는데 이는 2005년 말 추정액보다 30% 증가한 수치였다.



전문 데이터 제공업체에 따르면 아시아 헤지펀드는 펀드의 수와 운용자산 규모 면에서 계속해서 기하급수적 성장을 거두고 있다. 가장 오래된 헤지펀드회사 중 하나로 1986년 마이클 소패어(Michael Sofaer)가 홍콩에 설립한 소패어 캐피탈(Sofaer Capital)은 자신들이 1989년에 최초의 아시아 전용 주식 매수/공매도 펀드를 출시한 장본인이라고 말했다.

2000년대에 전세계 헤지펀드 시장이 펀드의 수나 운용자산 면에서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1990년대의 자본증식 시기에서, 2000년대의 자본보존 시기로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헤지펀드는 절대수익을 내는 데 있어 이상적인 자산군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현금이 유입되는 측면이 있어 이러한 시기와 들어맞는다.

둘째로 2001년과 2002년 매수형 펀드들이 손실을 입은 후 전통적인 매니저들은 매도를 위해 다른 상품들을 찾고 있었으며, 또한 언론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투자자들의 관심도 불을 지피게 되었다.



셋째, 특히 신용분야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고도의 금융상품들이 개발되면서 각기 다른 리스크-수익 구조(Risk-return profiles)를 가진 흥미롭고 새로운 헤지펀드 전략이 가능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헤지펀드 인프라와 운영지원서비스 측면에서 괄목할만한 향상이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매니저들이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장벽이 낮아졌다.

펀드 오브 헤지펀드(FOHFs)의 등장은 시장 발전과정에 있어 필연적 단계였으며, 펀드 오브 헤지펀드의 급속한 성장은 투자자에게 상대적 수익이 아닌 절대수익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기인한다.

1969년에 레버리지드 캐피탈 홀딩즈(Leveraged Capital Holdings)가 설립되었으며 조지소로스(George Soros), 마이클 스타인하트(Michael Steinhart), 조지 갈로웨이(George Galloway)로부터 총 1800만~2000만 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모아 모집펀드(pooled fund)를 구성했다. 이 회사는 암스테르담에 상장되었으며, 초기 다섯 곳의 헤지펀드 매니저에게 투자했다.



오늘날 약 2300개의 펀드 오브 헤지펀드 유니버스가 무려 7450억 달러, 혹은 총 운용자산의 절반 가량을 운용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1990년에 80개의 펀드가 약 19억 달러의 자산을 운용했던 것과 비교해보면 시장에서 이들 펀드의 역할이 크게 발전했음이 분명하다.

펀드 오브 헤지펀드는 2007년 2분기에 174억 달러의 신규 자산을 모집했다. 이는 1분기에 모집한 79억 달러보다 2배 이상 증가한 수치로 시장은 더 크게 성장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헤지펀드는 본래 부유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사실 최근 몇 년 까지만 해도 규제나 투명성, 높은 손실에 대한 우려로 인해 기관투자자들의 투자도 매우 낮았다. 그러나 지금은 시장 전 부문에 걸쳐 다양한 투자자들이 헤지펀드가 포트폴리오에 가치를 더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헤지펀드가 처음 설립된 후 60년이 지난 오늘날, 헤지펀드는 이제 투자환경의 당당한 일부분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특히, 펀드 오브 헤지펀드는 확실한 입지를 굳히면서 많은 기관 투자자들이 헤지펀드 투자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효과적인 관문으로써의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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