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칼럼]모발이식의 역사

김수균 김수균모발외과 원장 2007.10.10 12:15
글자크기

대머리의사 김수균의 모발이야기⑭

탈모가 많이 진행된 경우 시행하는 수술로는 현재 모발이식술을 가장 많이 하고 있다. 아무리 대머리라도 머리의 양 옆과 뒤쪽의 모발은 빠지지 않기 때문에 이 부분의 머리를 대머리 부위에 이식하는 방법이다.

그러면 이 모발이식은 어떻게 개발됐고 또 어떻게 발달해왔을까.



최초의 모발이식은 200년전인 1804년에 ‘바로미오’라는 사람이 처음 실시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분이 동물실험에서 털을 붙인 채로 피부이식을 했는데 그 털이 살아 있더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 본격적으로 사람에게 모발이식을 한 것은 문헌상 1936년에 일본 피부과 의사인 오쿠다 박사가 두피에 화상이 있는 환자의 화상 부위에 작은 원형 구멍을 내고 모발이 있는 원통형 이식편을 이식한 것이 시초다. 그리고 1942년에 후지타라는 분은 좀더 이식편을 작게 해서 화상 환자를 치료했다.



그 뒤 1950년에 바스키란 분이 화상 환자에게 음모와 겨드랑이 털을 붙인 채로 피부이식을 했는데 원래 음모와 겨드랑이 털의 특성을 간직한 채 자란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식한 음모와 겨드랑이 털이 머리카락처럼 길게 자라는 게 아니고 원래처럼 꼬불꼬불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1959년에 미국 의사 오렌트라이히 박사가 털은 원래 있는 자신의 성질을 갖고, 다른데 옮겨 심어도 그 성질이 변하지 않는다고 해서 공여부 우성이라는 개념을 정립했다. 즉 뒷머리 부위의 모발은 대머리 부위로 이식해도 정상적으로 자라지만 대머리 부위의 잔털은 후두부에 이식해도 잔털에서 점점 더 가늘어진다는 것이다.

결국 대머리의 원인은 두피가 문제가 아니라 모발 자체가 문제라는 것. 그렇게 해서 오렌트라이히 박사가 펀치 식모술을 개발했는데 그 방법이 일본 의사인 오쿠다 박사의 방법과 동일하여 오쿠다-오렌트라이히법이라 명명했다.


이 부분에서 잠깐, 음모와 겨드랑이 털 얘기가 나왔으니 재미있는 유머 하나 덧붙인다. 미국의 어느 대학병원에 멋진 금발미녀가 신경과 의사를 찾아왔단다.
“선생님, 제가 두통이 심해서 도대체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벌써 한 달이 넘었는데도 좋아질 기미가 없으니 어떻게 하면 되나요?”

얘기를 듣고 난 의사가 대뜸 바지와 팬티를 벗어보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머리 염색을 심하게 해서 그러니 머리카락을 원상태로 돌리면 된다고 처방했다. 의사의 처방대로 염색을 푼 뒤부터 환자의 두통이 사라졌다. 옷을 벗어보라고 한 것은 음모의 색깔도 금발인지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단다. 염색이 두통을 유발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체모가 머리카락과 거의 같은 색을 띤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다시 본론. 그런데 펀치 식모술은 이식편이 크고 이식편 당 12~20개의 머리카락이 들어 있어 이식한 모발 모양이 칫솔같이 부자연스럽고 두피가 자갈밭같이 울퉁불퉁하게 보여 이식편을 점점 작게 하는 노력을 해서 새로운 방법이 속속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개발된 것이 미니식모술, 마이크로 식모술, 더 나아가서 모낭군 이식술, 단일모 식모술 등으로 점차 자연스러운 형태로 발전하였다.

이 기사의 관련기사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