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銀 수지위기, 통화정책과 독립성에 짐

머니투데이 강종구 기자 2007.03.30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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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간 22조 정부 상납…환율방어자금 이자비용만 9조 넘어

한국은행 수지가 위기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지난해 1조7000억원대의 대규모 순손실을 포함 3년 연속 적자로 그동안 쌓아두었던 임의적립금을 전부 소진했다.

만약 또 다시 조단위의 대형 적자를 낸다면 당장 1~2년안에 2조원 남짓 남은 법정적립금마저 바닥을 드러낼 처지다. 이 경우 한은법 100조에 따라 구멍난 수지를 정부가 보전해 줘야 한다. 결국 국민의 세금이 한은 적자를 메우는데 쓰이게 되는 셈이다.



한은의 적자가 고질병으로 굳어질 경우 더욱 큰 문제는 통화정책의 문제다. 경제적 독립성을 상실하고 정부에 기대야 하는 처지라면 중앙은행으로서 신뢰성은 땅에 떨어질 것이고, 정부로부터 정치적 독립성마저도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환율방어의 후유증..독박 쓴 韓銀



한은으로서는 만년 적자 중앙은행이란 비난이 땅을 치도록 억울할 일이다. 적자에 빠진 근본적인 이유가 정부의 정책방침에 따라 환율하락을 막는데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데 있기 때문이다.

환율을 사수하기 위해 정부와 한은은 막대한 규모의 국채(외환시장안정용)와 통안채를 발행해 그 돈으로 외환시장에 개입, 달러를 사들였다. 특히 달러약세가 심했던 2003~2004년에는 현재 잔액의 3분의 1이 넘는 무려 58조원의 통안채가 순발행됐다.

韓銀 수지위기, 통화정책과 독립성에 짐


그렇게 발행된 통안채가 지난해말 현재 158조원, 외평기금이 53조원으로 합이 211조원에 달한다. 한해 나가는 이자가 통안채는 지난해 6조8000억원에 달하고 외평기금에도 2조3000억원으로 합해서 9조원이 넘는다.


문제는 사들인 외화자산(외환보유액)의 운용수익으로 통안채와 외평기금의 이자를 지불하기 벅차다는 데 있다. 외환보유액은 가장 안전한 미국 국채 위주로 투자하고 있어 금리가 낮은 반면, 통안채와 외평기금 이자는 그보다 높아 구조적인 역마진의 문제점을 처음부터 안고 있었다.

역마진 문제가 한은 적자로 나타난 것은 2004년부터. 그해 6월이후 미국이 11차례나 금리인하를 단행, 1%까지 떨어뜨리고 환율이 급락하자 한은 수지는 급속도로 악화됐다.2005년 외화자산 운용으로 5조7000억원의 이익을 냈지만, 통안채와 외평기금 이자로 7조6000억원이 나갔다. 지난해엔 7조4000억원으로 외화자산 운용이익이 늘었지만 내야 할 이자는 9조원대를 넘어서 있었다.



韓銀 수지위기, 통화정책과 독립성에 짐
더 억울한 것은 그동안 벌어들인 막대한 이익마저 정부에 상납했다는 것. 2003년까지 9년 연속 흑자행진을 하며 27조6000억원의 누적흑자를 기록했지만, 이중 82%인 22조5000여억원이 정부 예산으로 넘겨졌다. 강제적으로 쌓게 돼 있는 법정적립금(순이익의 10%)를 제외하고 사실상 전부 정부가 가져간 셈이다.

환율 오르기만 바래야 하나..현실적인 해결책 별로 없어

적자보다 더 큰 문제는 현실적으로 구조적인 해결책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통안채를 갚아야 이자비용을 줄일 수 있는데, 이 경우 그렇지 않아도 유동성이 넘치는 시중에 추가로 더 많은 통화를 공급하는 셈이 되고 만다.



지난해부터 국민연금과 통화스왑 거래를 대폭 늘려 표면상으로는 통안채 증가액이 크게 둔화됐지만, 여전히 낮은 이자를 받고 높은 이자를 줘야 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은 관계자는 "해결책은 간단하다. 통안채를 정부가 가져가면 된다"면서도 "그러나 이 경우 국가부채 문제가 대두되고 결국 이자부담을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해야 된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물론 확실히 해결될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환율이 급등하고 미국 등의 금리가 크게 오르면 된다. 그럼 외화자산에서 생기는 이익이 급증하기 때문이다.



이성태 한은 총재는 28일 취임1주년 특별대담에서 "한은 수지 문제는 2~3년 안에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면서도 "지난 2~3년 한은 수지에 가장 나쁜 쪽으로 국내외 경제환경이 움직였는데, 앞으로 조금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면 한은 수지도 다소 개선될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또다른 한은 관계자는 "미국 경제가 너무 좋아져 금리가 크게 오르거나, 환율이 치솟아 한은이 외화자산을 팔게 되면 누적된 손실을 한꺼번에 털 수도 있다"며 "그렇다고 한은이 적자를 면하자고 외환위기가 다시 오길 바랄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며 자조섞인 듯 말했다.

"총액한도대출 축소 필요"..해외투자 확대도 도움



근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한은 수지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조치들은 여럿 있다. 국회 재경위원회 수석전문위원실은 그중 법정적립금 비율을 상향조정하고 환율재평가 적립금을 별도 설치할 것을 건의했다. 또 이익이 날 경우 정부에 납입하지 말고 충분한 수준까지 임의적립금을 쌓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은이 지난해 11월 단행한 지급준비율 인상도 수지에 도움이 된다. 통안채로 유동성을 흡수하면 이자를 줘야 하지만 지준에는 이자가 붙지 않기 때문이다.

통안채 발행유인을 줄이는 것도 병행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중 하나로 논의되는 것이 중소기업을 위한 총액한도대출을 없애는 것이다. 한은은 지난해까지 9조6000억원이었던 한도를 올해 1분기 8조원으로 줄인 바 있다.



한은 관계자는 "총액한도대출은 통화조절이나 지급결제 안정 등 한은 본연의 목적과 동떨어진 정책금융의 성격"이라며 "총액한도대출을 줄이면 그만큼 통안채를 발행할 필요가 사라진다"고 말했다.

현실적으로는 통안채를 더 늘리지 않고 점진적으로 줄여나가는 방법을 추진해야 한다. 또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국채로 통합하는 방안도 모색할 시점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통안채 이자가 과거 환율정책의 유산인만큼 정부가 부담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병화 한은 정책기획국장은 "통안채를 국채로 통합하면 근본적으로 한은 수지 문제가 해결되지만 정치적으로 민감하고 정부로서도 부담이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해외투자 활성화는 통안채 발행유인을 줄이기 때문에 상당히 도움이 되고, 그 외에 유동성을 수속하더라도 낮은 비용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거나 외화자산을 운용할 때 고수익자산의 비중을 늘리는 등 무리가 없는 방법으로 하는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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