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톤 金 매장 추정 부산 어뢰창고 '도굴설'

뉴시스 2004.03.17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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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색 포대사라져..일반굴로 교묘하게 위장

지난 2002년 3월 부산항 부근 지하 16m에서 발견된 동굴이 여러 증언과 단서들이 전문가들의 검증을 거치면서 일제시대에 팠던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이 굴은 발견 당시에 무인 수중카메라에 잡힌 금괴로 추정되던 황토색 포대들이 사라지고 돌이 담긴 포대들로 채워져 일반굴로 교묘하게 위장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따라 굴안에 있던 물건들이 도굴됐다는 의혹이 강하게 일고 있어 관계당국의 철저한 조사가 요구된다.

굴은 조선 총독부 소유였던 부산시 남구 문현동 1219 에서 수직으로 16m 아래에서 발견됐다.굴 형태가 어뢰등 폭발물을 저장할 수 있도록 군사용으로 설계됐다는 점으로 미루어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인 1945년 5월 '황금백합작전'으로 중국에서 탈취한 금괴와 국보급 문화재등을 숨겨놓았다는 어뢰창고 한부분일 가능성이 커 도굴 의혹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굴은 발견당시 무인수중카메라를 굴착구에 집어 넣어 물에 잠긴 지하 요새 통로를 촬영한 결과 아주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황토색 포대들이 5층 높이로 차곡 차곡 쌓여져 있는것이 확인돼 수백톤의 금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됐었다.첫 발견자는 정충제씨(56 경남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 61)다.

그러나 발견직후 이 굴 탐사에 참여했던 백준흠(47 서울 중구 회현동 1가 147) 김성태(55 부산 동구 범일2동 62) 채상훈씨(49 부산 사하구 감천2동 17) 등은 이 굴이 "정씨가 박정희 대통령 이발사였던 박모씨와 1992년부터 1997년까지 판 굴"이라며 정씨를 사기꾼으로 몰고 정씨의 접근을 막은 뒤 굴을 변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17일 뉴시스 취재결과 굴 탐사와 발굴에 직 간접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들로부터 김씨와 채씨에게서 굴에서 발굴된 것으로 추정되는 직사각형 금덩이를 확인했다는 증언마저 잇따르면서 굴 발견 후 최근까지 이들의 행적에 대한 의혹은 잦아들지 않고 있다.


또 굴이 발견된 뒤 일대 땅을 매입해 백씨등에게 합류했던 김홍랑씨(52 광주 서구 치평동 1171)가 지난해 말 서울 강남에서 정체불명의 금괴 10톤을 팔겠다는 제안을 듣고 나간 자리에 있었다는 목격자마저 나타났다.

◇굴 내부는 변조됐다

굴 발견후 곧바로 정씨를 배제시킨뒤 탐사작업을 주도한 백씨등은 정씨가 2002년 5월 부산지법에 굴에 대해 이용 및 접근금지 가처분신청을 내자 한달뒤인 6월 초 "정씨가 박씨와 판 굴을 보물이 있는 굴이라고 속여 사기행각을 벌였다"며 경찰에 고소했다.

이들은 그해 6월 24일 정씨의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졌으나 계속 정씨의 접근을 막았으며 그해 9월까지 약 6달 동안 현장을 봉쇄한채 은밀하게 발굴작업을 해왔다.

이들은 그해 9월 6일 정씨가 부산시청 출입기자 30여명까지 불러 현장조사를 했을때는 돌 등이 담긴 15kg들이 이타정밀 포대가 굴안에 있었다고 내보였다.

그 자리에서 있었던 수중무인카메라 촬영에서도 35m 길이의 동굴 양벽으로 돌과 벽돌 부스러기등이 담긴 포대들이 쌓여있었고 또 1996년과 1993년에 제작된 PVC 파이프가 발견돼 백씨측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듯 했다.

그러나 굴은 내부의 형태를 확인한 전문가들의 검증과 탐사 발굴에 참여한 사람들이 증언이 나오면서 굴의 변조 가능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10년전에 박씨와 함께 굴을 팠다는 나현철씨(56 부산 사하구 다대2동 96)는 지난해 2월13일 보도된 YTN과의 인터뷰에서 "굴 내부를 찍어온 화면을 보지도않은 상태에서 자신이 판 굴이라고 주장했다"고 말했다.

그는 2002년 8월 10일 부산시경 기자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하기전 "(백씨 측근이 본인이 팠다고 하라.기자들이 물어보거든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또 지난해 10월2일 수중카메라로 촬영한 비디오에서는 2002년 9월 6일 내보였던 이타정밀 포대가 아닌 30kg 한주소금 포대로 바뀌어 있었다.돌 전문가 최철문씨(58 경남 통영시 봉평동 192)는 "그때 꺼집어낸 한주소금 포대안의 돌은 그 일대가 청석층인데도 공사장에서 흔히 볼수있는 잡석이 섞여있었다"고 말했다.

백씨등의 주장이 맞다면 나씨가 10년전에 판굴과 새로 발견된 굴은 모든 면에서 일치해야 하나 나씨가 실제로 팠던 굴과 새로 발견된 굴과는 여러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도굴된 것은 금괴인가-목격자들 "유출된 금덩이 봤다"

특히 주목할만한 사실은 김성태 채상훈씨가 그 굴에서 발굴한 것으로 보이는 금덩어리를 갖고 있었다는 목격자들이 이어지고 있다는 대목이다.

김종점씨(55 경남 거제시 신현읍 고현리 161)는 "김성태씨가 2002년 3월 '현장서 지하어뢰공장 굴을 발견했다'고 말하고 얼마 안돼 돌포대가 나왔다고 번복했었다"며 "그러나 그해 6월말 7월초에 그들이 굴 발굴작업을 시작하면서 만든 발굴전문회사인 '포세이돈 살베지의 고문으로 와달라'며 그의 차안에서 비닐봉지에 안에 든 작은과자 같은 직육면체 모양 금조각 10개정도 보여줬다"고 말했다.

정충제씨의 동생 관제씨(51 경남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 61)도 비슷한 시기에 금을 보았다고 증언했다.관제씨는 "2002년 5월 25일 채상훈씨가 불러 함께 술자리를 하는 자리에서 '굴속에 금이 가득하다'며 비닐주머니에 직경 1~1.5㎝인 초승달 모양의 금덩이 2개와 길이 5~6㎝ 두께 0.7~0.8㎝의 직사각형 금덩이 1개를 보여줬다"고 말했다.

지난해에도 도굴된 금을 본 목격자가 나왔다. 굴 탐사를 도왔던 박인규씨(49 부산 금정구 남산동 48)는 정확한 날자와 시간도 기억하고 있다.박씨는 "김성태씨가 지난해 2월 20일 오후4시 자신의 친구 집으로 데려가 '고생끝 행복시작의 증거를 보여준다'며 비닐봉지안에 들어있는 밀크 캬라멜 형태의 금 덩이 7~8개 보여줬다"고 증언했다.

지난해 10월에는 금괴 10톤을 봤다는 목격자까지 등장했다. 서울 강남에서 금 도매상을하고있는 송모씨는 "금괴 10톤을 시세 절반가격인 톤당 80억원에 팔겠다는 작자가 나타나 부하직원 2명을 보냈는데 이들이 모처에 가서 금괴를 봤으며 금괴 주인은 김홍랑씨라고 내게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또 "당시 김홍랑씨를 경호하고 온 사람은 이름이 탁종수라고 직원들이 알려줬다"고 말했다.탁씨는 김홍랑씨와 같이 백씨등이 만든 포세이돈 살베지의 주주였던것으로 밝혀졌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금의 경우 족보가 있어 추적이 가능해 출처를 밝히기 곤란한 금은 주물공장등에서 녹힌뒤 공업용 금으로 유통시키는 경우가 많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이럴 경우 금값은 통상의 절반 값 정도에 거래된다는 설명이다.

◇"굴은 일제시대에 어뢰창고"

굴이 조작됐다는 근거는 조작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굴 내부의 모양이나 공법이 일제시대의 것과 일치한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굴 내부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고 판단했지만 전문가들은 굴이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우선 굴 형태와 내부에서도 일제 시대의 굴을 최근에 판굴로 조작한 증거는 7가지 정도다.발견된 굴의 천장은 일직선인 직사각형 모양이다.일제시대 일본인들이 판 굴은 대부분 사각형이다.요즘은 아치형으로 직사각형의 굴은 보기 힘들다는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또 굴이 직각으로 세번 꺾어져있다는 점도 주목할만 하다.김운영 교수(육사 토목공학과)등 지하군사시설 전문가들이 지난해 3월 발표한 학술논문에 따르면 지하 탄약고의 경우에 만약에 있을 폭발사고에 대비해 굴을 직각으로 판다는 것이다.

굴 내부의 벽면과 천정의 폭파흔적 그리고 폭파를 위한 천공의 규격과 간격은 결정적인 증거다. 폭파흔적은 굴착방법이 화약을 사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게다가 천공의 규격과 간격은 해방전 일본이 주로 사용하던 폭파방법이다.

천공의 크기는 지름30㎜㎝정도로 일제시대에 주로 이용됐던 28㎜빗트를 사용했다는 증거다.관련서적에 따르면 간격이 중앙은 15㎝ 바깥은 25㎝정도가 된다는 점도 흑색화약을 사용해 판 일제시대의 굴임을 나타낸다. 일본 동경 山海堂에서 펴낸 '發破 핸드북' 공업화약협회편을 보면 여실히 확인된다.

요즘은 28㎜빗트를 찾아 보기가 힘들다는게 공구상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다. 10년전 나씨와 함께 굴을 팠다는 신영만씨(57 부산 해운대구 좌동 주공2단지)도 "당시 42㎜빗트를 사용했다"고 증언했다.

굴내부에서 발견된 10여개 빗트의 부식정도는 공사가 60~70년전에 이뤄졌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굴안에서 발견된 빗트의 부식 정도는 3㎜ 정도다.건축실무 관련서적에 따르면 민물에서 빗트는 1년에 부식되는 정도가 평균 0.05㎜이다.산술적으로 60년이라는 답이 나온다.함께 발견된 PVC 파이프와 상충되는 대목이다.

백씨등이 주도적으로 발굴작업을 벌이던 당시 경비를 맡았던 최차용씨(53 부산 영도구 청학1동 468)는 "PVC파이프를 트럭에 싣고 들어와 마당에 놓고 작업을 했다"며 "그걸 잘라 굴속으로 잡아 넣긴 넣었다"고 말했다.

◇정씨 "어뢰 창고에는 보물 숨겨있다"

이곳에는 일본군이 패망을 앞두고 중국에서 수탈한 엄청난 액수의 보물과 국보급 문화재 등이 함께 은닉돼 있는 것으로 정씨측은 추정하고 있다.

정씨에 따르면 11년전 우연히 부산항의 지하시설에 일본군이 보물을 숨겨뒀다는말을 듣고 탐사를 시작했으며 굴착 2달전인 2002년 1월초 대전 모 대학 손모 교수에게 문제의 땅 주변에대한 전자 탐사를 실시한 결과 저비저항대(동굴통로)가 있음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이 일대를 탐사한 미국 전문 지하탐사회사는 길이 3.5㎞, 폭 40m, 높이 7m 크기의 지하 공간이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고 정씨는 설명했다 .

지하 통로가 발견된 곳은 현재 부산항내 일제시대 군용철도역이었던 우암역에 인접해 있으며 우암로에서 30m, 부산항 북항 바다와는 50m 정도 떨어져 있다.

부산 남구청 토지대장상에는 문제의 이 땅이 1934년 이전에는 조선 사람들 간에 거래되다 이후 일본 도쿄에 사는 일본인 소유로 넘어갔고 다시 서울에 조선지사를 둔 일본목재주식회사로 등기이전됐으며 일제 패망 직전인 1945년 7월3일에는 조선총독부 소유가 됐다.

정씨는 불모지나 다름 없는 땅의 소유주가 갑자기 일제의 조선총독부로 바뀐 것이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지하에 중요한 시설물이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씨는 보물작업 탐사를 하면서 부산에서 강제 징용된 3명의 노무자를 찾아 인터뷰한 결과 부산항 중앙부두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으로 눈가리개를 한채 실려가 지하시설물 굴착 작업을 했는데 이곳이 문제의 땅 지하라는 것이다.

실제로 해방 직후 우암동 앞 바다에서는 좌초된 목선 어창에서 어뢰가 가득 실려 있는 것이 한 사진사에 의해 발견됐고 지난 74년엔 동천 하류 앞바다 목조 부두아래지점에서 펄에 박힌 어뢰 4개가 잠수부에 의해 발견되기도 했다.

정씨는 일제가 패망 전 중국에서 수탈한 화차 14량분의 금괴(470톤)와 금동불상 36좌와 국보급 문화재를 잠수함을 이용 부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가져 가려다 미해군에 의해 해상항로가 모조리 봉쇄 당하면서 이곳 지하시설물에 숨겨 놓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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